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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교수소식 > 인터뷰 > 지성과 영성으로 삶과 가족을 논하다

 제목 |  지성과 영성으로 삶과 가족을 논하다
 작성자 |  Admin   작성일 |  2010/04/10 11:56 am

오늘 아침 2010년 4월 9일자                                                                                                                     뉴스미션의 교계뉴스에 실린                                                                                                                      이어령(전 문화부장관), 이재철 목사의 '지성과 영성으로 삶과 가족을 논하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인터뷰의 내용이 참으로 좋아서 스크랩하여 올립니다.

'지성과 영성의 만남’으로 관심을 모은 양화진문화원(명예원장 이어령)의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이재철 목사 특별대담’이 8일 오후 8시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삶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어령 전 장관과 이재철 목사는 물질만능시대의 성공 지향적 삶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 이혼율 증가 및 기러기아빠로 대변되는 가족해체의 문제 등 우리 사회와 성도 개개인이 직면한 과제들을 각각 ‘지성’과 ‘영성’의 코드로 풀어냈다.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대담은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도 해학적인 웃음과 통찰,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답변으로 참석자들의 눈과 귀를 붙들었다.

▲양화진문화원은 8일 삶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과 이재철 목사의 특별대담을 열었다.©뉴스미션


- 삶이란 무엇인가.

이어령: 어려운 질문이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앎과 삶 모두에 ‘ㄹ’ ‘ㅁ’이 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앎이라면, 느끼는 것이 삶이다. 아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사는 것은 말할 수 없다. 담배를 피는 누군가에게 ‘무슨 맛으로 피냐’냐고 묻는다면 ‘그 맛으로 핀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 역시 아는 게 아니다. 성경을 안다 혹은 기독교를 안다는 말은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 기독교에 뛰어들면 말로는 못하지만 ‘그맛’이라는 뭔가가 있다. 삶이란 ‘번지점프하지 말고 뛰어내려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다.

- 성경에서는 삶을 뭐라고 하는가.

이재철: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바로 알려고 할 때 그 대상만 들여다보면 오히려 실체를 놓치기 쉽다. 오히려 그 대상과 전혀 상반되는 것을 같이 놓고 보면 우리가 알려고 하는 대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을 알기 위해서는 대비되는 죽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삶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죽음은 순서가 없다. 그리고 장소의 구분이 없다. 죽을 ‘사(死)’의 한자를 파자하면 한밤에 비수처럼 날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오늘도 우리가 하루 살았다 하는데 사실은 하루 죽은 거다. 50년을 살았다하면 50년 만큼 죽은거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다. 죽음을 모르면 살기는 살아도 무의미하게 죽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살면 호흡이 끊길 때 후회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 에노스 때에 비로소 여호와를 불렀더라는 말씀이 있다. 히브리서를 보면 그 때 인간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걸 안거다.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찾게 됐다는 것이다. 죽음을 알고 삶을 알고 하나님을 찾으면 ‘인생 사용설명서’를 알게 된다. 인생, 삶이라는 제품을 바로 알게 된다. 삶을 알기 위해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서면, ‘여호와’라는 생명을 찾을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삶의 설명서를 찾게 된다.

-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건가.

이어령: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죽음과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사는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예술가나 문학가는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있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일 뿐이다. 슬픔이나 아픔에 대해 심리학자나 의사가 정의를 내리지만, 문학은 얼마나 슬픈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다. 성서에서도 해답이 이루어지는 것들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런데 욥이 죄가 없이 고통을 당하고 주변에서 ‘네가 아무죄도 없는데 불행해졌으니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은 얼마나 실감이 있는가. 예레미야애가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해치는 얘기 같은 것은 참 실감 있다. 아픔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독일 문학가 하이네는 인생의 말년에야 하나님께로 돌아갔는데, 이 사람은 희랍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평생 비너스와 같은 잡신을 믿었다. 그런데 말년에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비너스 상에 안겼을 때 두팔이 없는 비너스가 안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범신론자였던 하이네는 두 팔로 끌어 안아 줄 수 있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하이네의 지성은 삶과 죽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것이 지성이다. 이재철 목사가 얘기한 삶과 죽음은 위에서 봐야하는 데 우리는 아래 있기 때문에 방황한다. 생사를 넘어서야 생사를 보게 되는데, 나는 어렴풋이 그 말이 그 말이고, 저 말이 저 말인 정도만 알겠다.

- 영성의 입장에서 바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이재철: 바로 산다는 절대기준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 바른 삶이다. 그럴 때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앞서 말했듯이 죽음을 알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좇는 자에게 성경은 인생사용설명서가 된다. 사람들은 고가제품을 구입할수록 제품사용설명서를 숙지한다. 그것이 그 제품을 극대화, 절대화 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 어떤 제품보다 더 귀한 인생이라는 제품을 하나님의 인생사용설명서대로 사용하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바르게 사는 길은 그분의 말씀 속에 있다.

-가족의 의미에 대해 얘기해 달라.

이어령: 집을 나타내는 한자 ‘가(家)’ 밑에는 사람 ‘인(人)’이 아니라 돼지 ‘시(豕)’가 있다. 그런데 이게 참 재밌다. 세 가지로 해석이 나오는데 첫째는 옛날 사람들은 동굴에 살고 동물들은 울타리 안에 가뒀다. 비를 피해야 했기에 지붕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돼지 집이 좋아보여서 지붕 아래 돼지가 있는 형상이 됐다는 거다. 이것은 가정을 먹는 공동체로 본 것이다. ‘식구’도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즉 경제적인 부분을 의미한다. 가족의 기반은 먹는 공동체, 한솥에 밥을 먹는 것이라는 의미다. 돼지로 상징되는 하나의 양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해서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돼지가 새끼를 많이 낳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한다. 결혼하고 먹는 이유가 다 애를 키우고 낳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많이 낳고 다복하게 지내는 것이 가정이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마지막이 정답인데, 돼지는 농경사회를 의미하는 거다. 돼지는 유목민이 키울 수 없다. 정착 생활을 했을 때에만 키울 수 있었는데, 농경사회에서는 돼지를 제물로 바친다. 즉 가정이 돼지를 바치는 집, 종교적 공간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 가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족의 세 가지 의미는 경제 공동체이자 생물학적 장소, 하나의 이념과 기도하는 대상을 가진 공동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성경에서도 가족을 중시하는데?

이재철: 사람 ‘인(人)’자가 서로 기대어 있듯 삶이란 두 사람 이상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사람이 모이면 ‘삶’이 된다고 하셨는데, 삶의 ‘ㄹ,ㅁ’을 ‘사람’으로 봤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만 산다면 ‘삶’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인간의 삶은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데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인간관계의 첫 출발점이다. 자기 헌신을 통해서 사랑을 몸에 익히는 장소이자, 타인에 대해서 어떤 책임과 의무를 익히는 곳이다. 민주시민의 역량도, 윤리도덕을 배우는 곳도 출발점은 가족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든 이야기가 ‘창세기’이지만 그 이야기는 1,2장에서 끝난다. 오히려 창세기의 나머지는 아담과 하와, 노아, 바벨탑 이후의 가정들에 대한 이야기다. ‘창가정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정이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기본단위가 건강하다는 의미이고, 병든 사회는 결국 가족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사랑과 사람사랑 두 기둥으로 믿음의 축이 이뤄지는데, 사람사랑의 기본이 가족으로 이뤄지니 성경이 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얘기해보자. ‘성공’의 의미가 곧 ‘경제적 성공’이 되고 있는 시대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하나. 성공이란 무엇인가.

이재철: 인생의 성공을 이야기하려면 내가 성공하는 것이 어떤 길 위에서의 성공인가가 증명돼야 한다. 예를 들어 어부에게 밤을 새워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월척하는 게 성공이다, 하지만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낚시하는 것이 시간 낭비다. 밤을 새워 고기를 잡아야 하는 어부가 책상에서 밤을 세워 책 읽는 것이 실패의 길을 가는 것이듯,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 성공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말하는 성공과 세상이 말하는 성공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땅 한 평 없었고 통장에 1원의 재산도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바울도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분들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이 세상과 구별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재확인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다. 여러 가지로 대답하니까 ‘너희들에게 내가 누구냐’ 물으셨다.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반석이라 칭하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즉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를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데,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가에 대한 규명이 또 한 번 필요해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신 장소는 벳새다 벌판이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였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당시 분봉왕 빌립과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다.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붙어있는 도시가 여러 개였다. 하지만 황제의 이름을 붙이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상당규모 이상의 도시여야 했고, 가장 중심부에 황제의 신전이 있어야 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인간으로부터 경배를 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경배받는 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셨다. 상권을 장악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당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비움과 자기 헌신의 예수의 길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 길은 나를 버리고 영원을 얻는 길인데, 지금 로마황제의 모든 흔적은 폐허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주로 살아 계신다. 성경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건저 올린다’는 뜻이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있는데 시간을 자기 욕망으로 물거품처럼 날린 사람도 있고, 그 시간을 영원으로 건져 올린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공은 황제의 길에서의 부와 성공을 갖지 못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길 위에 있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부와 성공을 갖더라도 예수의 길에 서 있지 않다면 성공은 아니다.

이어령: 예수님 관계없이 생각해보자. 내가 사냥해서 토끼를 잡았다 치자. 가족이 없는 사람은 배가 고프니까 그 자리에서 먹는다. 하지만 가족이 있는 사람은 배고픈 걸 참고 자신의 먹잇감을 가족에게로 가지고 간다. 식욕과 사랑 중 누가 이긴 것이냐. 사랑이 이겼다. 가족은 절대 희생과 사랑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에 시장원리가 가정의 원리라면, 돈 많이 버는 것만이 성공이라면, 가족은 그날 바로 없어진다. 생각해 보라. 부인과 처음 결혼할 때는 날씬했는데 살면서 뚱뚱해졌다. 가정이 만약에 시장원리라면 처음과 달리 변형된 물건을 바꾸지 않겠는가. 당장 리콜하지 않겠는가. 수능 시즌에는 또 어떤가. 가정이 시장원리라면 나쁜 물건을 좋은 물건 바꾸듯이 성적이 낮은 자식을 내버리고 교환할 것이다.

하지만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가족 원리다. 아담스미스조차 모든 것을 시장원리로 맡기면 잘 돌아간다고 했지만, 가정만은 예외로 뒀다. 그런데 지식정보화 사회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시장원리가 가정에 들어오면서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농업사회에서 생산의 단위였던 가정이 산업화 이후 소비의 단위로 전락하면서, 가정이 사치의 장소가 됐다. 가장 우선 순위는 사랑이다. 아름다운 진리가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돈이 있는 것이다. 가족의 절대적인 기준은 부에다 둘 수 없다. 돈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다.

- 이혼 가정이 많아지고 있다. 이혼은 어떻게 보는가.

이재철: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께서 이혼에 대해 말씀하신 대목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질문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말하는 이혼에 대해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답변하셨다. 출애굽 당시부터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했던 시기까지 이혼의 문제는 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면서 믿는 남편 혹은 아내가 믿지 않는 아내와 혹은 남편과 함께 살 수 없을 때 믿음의 이유로는 허락한다. 하지만 토를 달아 믿지 않는 아내와 남편이 혹 너희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권면한다. 저도 목회자로 이혼 고민 상담을 받으면 바울처럼 권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해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권한다.

이어령: 한국 가정에 왜 이혼이 많아졌느냐고 하지만, 조선조 때부터 이혼이 많았던 거다. 당시에는 그냥 참고 살았던 것일 뿐이다. 무슨 재미로 살았겠는가. 지금 갑자기 이혼률이 높아진 것이 아니다. 부부관계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말씨부터 고치지 않으면 이혼률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믿음, 사랑, 소통이 없으면 부부가 함께 하기 어렵다. 미국에서는 이혼 법정에서 ‘ 부부간에 사랑한다고 말한지 얼마나 됐는가’ ‘자녀와 야구 안 한지 얼마나 됐는가’를 묻는다. 잘 사는 것같은 한국 부부도 미국법정 가면 이혼 대상 많을 거다.

나는 이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 보다 이혼을 안 하고서도 살 수 있는 법에 대해 말하고 싶다. 대화법, 공통의 취미만 있어도 이혼 안하고 살 수 있다. 이혼을 하느냐 안하느냐 여부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입장이지만, 한번 실패한 사람이 다음에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집사람과 나는 50년 이상 살았다. 아버지나 형님들보다도 더 오래 같이 산 것이다. 우리는 둘다 문학을 했다. 이제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없어지고 서로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없어졌다. 그런데 같은 것에 감동하고, 같은 음악을 즐기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주례를 많이 서지 않지만, 나는 늘 결혼 직후 3일, 3개월, 3년의 중요성을 말한다. 3년을 잘 보내면 30년까지는 갈 수 있다.

- 그렇다면 바람직한 결혼생활이란 무언가.

이재철: 하나님은 결혼의 정의를 ‘둘이 한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셨다. 부모와 자식이 한 가정에서 같이 살지만, 부모와 자식은 한 몸을 이룰 수 없다. 부모와 자식은 1촌이고 형제는 2촌이다. 이 세상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루고 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존재는 남편과 아내 밖에는 없다. 결혼한 부부가 바른 결혼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서로 0촌인 관계를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0순위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남편과 아내를 0순위로 대하는 동기는 첫째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한 몸 이룰 존재로 주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상대에 대한 믿음으로 드러나야 한다. 각각 파랑과 노랑으로 색이 다른 두 사람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기 때문에 녹색이 되어 한몸으로 승화되는 것, 그 사랑 속에서 자식들도 가게 되는 것이 가정이다.

-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가.

이재철: 성경에서 자식의 의무를 말하는 구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좋은 부모가 될 것을 말한다. 자식이 있기 전에 부모가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가 좋은 자식을 만든다. 좋은 믿음의 부모가 바른 믿음, 바른 가치관, 바른 인생관을 가지면 자녀의 삶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부모의 가장 큰 문제는 부모가 어른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부모가 어른이 되지 않고 나이 먹은 노인으로만 바뀌는 것이다. 사람의 호칭이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데 장년에서 더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는 길이 있고 어른이 되는 길이 있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른으로 완성되는 과정 속에 있다. 어른과 노인의 분기점은 ‘내가 나를 더 생각하느냐, 상대를 더 생각하느냐’에 있다.

이어령: ‘하우스’는 벽돌로 짓지만, 홈은 사랑과 믿음으로 지어진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살아도 벗어놓은 신발은 다 다르다. 한 몸 같지만 다 다른 것. 이것이 우리 실정이다. 가족이 완벽하다면 종교를 안 믿어도 된다. 서로 사랑해야 할 자들이 증오하고 형제들끼리 서로 싸운다. 최초의 가정에서 카인과 아벨 형제는 살인을 했다. 형제니까 사랑해야 되는데 형제니까 죽였다. 이것이 원죄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우리의 조건이다. 가족은 역사상 화목하지 못했다. 옛날부터 너와 나의 문제가 있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족의 해결책이 되실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해결책이 있을지, 이것은 문명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기도 하다. 영성을 향해 가다보면 혹시 마지막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재철: 신발 이야기를 하셨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수도사들의 박물관에 갔었다. 수도사들이 쓰던 그릇과 책들이 있었는데, 신발보다 인격을 더 잘 보여주는 물건이 없다. 신발을 보면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는지 대개 알게 돼 있다. 신발이 더 리얼한 것은 존재가 빠져나간 신발 자체가 고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2백년 전에 수도사들의 신발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대면하시면서 ‘네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겠지만, 존재의 고독자체를 나한테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고독을 나(하나님)의 사랑과 소망, 생명으로 채워준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 모세의 신발은 고독한 실존의 상징이었지만, 다시 신을 때는 그의 인생이 바뀐다. 수도원의 신발을 보고 눈물이 핑 돈 것은 수도사들의 고독을 봄과 동시에,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봤기 때문이다. 고독한 존재끼리 살아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오히려 많으면 많을수록 황폐할 수밖에 없다. 존재의 고독을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우면 개인의 삶이 회복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그것이라고 믿는다.

-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이어령: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이웃은 누구인가. 내 상처를 붙들어주는 것이 이웃이 아니겠는가. 생물학적인 가족만이 가족이 아니다. 이웃 공동체가 곧 가족이다. 가족이라도 내가 피흘리고 쓰러졌는데 그냥 간다면,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라 할 수 있는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손을 어루만져주면 그게 가족이다. 가족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성경을 읽다가 화날 때가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거나,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 얘기가 그렇다. 그러나 믿음이 있을 때는 핏줄 위에 플러스 알파가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네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가족의 의미를 점차로 확대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험악한 세상에서 기독인의 살길은 늑대한테 잡아먹히지 않는 양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가족 공동체를 지킬 수 있다. 늑대보다 강한 양이 되되, 늑대와 싸우다가 호랑이가 되지는 말자.

이재철: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것이다. 순결하기만 하면 백치다. 지혜가 순결하게 하고, 순결이 지혜롭게 한다. 늑대보다 강하게 하기 위한 것이 순결과 지혜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약할 때 가장 강하다고 했다. 그는 세상에서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가문도 뛰어나고 혈통적으로도 뛰어났지만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황제의 길을 갈 때는 그런 것들이 굉장한 무기였는데 하나님의 길을 갈 때는 배설물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지혜와 순결의 길을 걸어간다면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한 주님 안에 새로운 길과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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